파란 약과 빨간 약 사이에서

2025
"파란 약을 삼키면 여기서 끝난다. 침대에서 깨어나 네가 믿고 싶은 걸 믿게 돼. 빨간 약을 삼키면 이상한 나라에 남아 끝까지 보게 될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넨 이 대사는 가상현실과 실재 사이에서 인간이 내려야 할 본질적인 선택을 압축한다. 안락한 무지(파란 약)를 택할 것인가, 불편한 진실(빨간 약)을 받아들일 것인가. 최우형의 신작들이 놓인 이 전시는 바로 그 두 알의 약 사이, 선택 이전의 문턱에 관객을 세워 둔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관객의 시선은 자연스레 벽에 프로젝션된 영상 작품 〈당신의 존엄성을 위한 가장 완벽한〉(2025)으로 모인다. 벡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세계 속 기계 신체가 끝없는 좌표 공간을 유영한다. 반복적인 기계음과 초음파 잡음이 공간을 채우는 가운데, 내레이션 대신 화면 하단에 건조한 자막 독백이 흐른다. 이 독백의 화자는 멸망 이후의 세계에서 몸을 쓰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 있는 인간이다. 그는 뉴럴링크—뇌 신호를 외부 하드웨어와 연결하는 기술—를 통해 곧 의식을 '클라우드'로 업로드할 예정이었지만, 시술 직전 사고로 시스템에서 누락됐다. 이는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알리타: 배틀 엔젤〉(2019)에서 생체-기계가 완전히 결합했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영상 속 존재의 의식은 매끄럽게 구현된 기계 육체와 병실의 실재 육체 사이를 왕복하면서, '존엄'이 어디에 속하는지 끝없이 묻는다. 최우형 작가는 이 예기치 못한 변수를 통해 그를 기술 혜택에서 밀려난 소외자로 남게 할지, 혹은 조정되지 않은 채 붕괴된 세계에서 독립적 인격으로 생존하는 마지막 인물로 설정할지 애매한 지점에 위치시킨다. 이러한 모호함으로 관객은 '사람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진 세계에서 실재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디지털 기록에 남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말소되는가?'라는 질문과 맞닥뜨린다. 최우형은 '새로운 기술이 구축한 체계에 진입하지 못한 존재'를 선택해 기술 유토피아의 맹점을 극대화한다. 제목에서 말하는 '가장 완벽한 존엄'이 과연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가, 그리고 설계에서 탈락한 예외적 존재는 어떤 존재로 남는가와 같은 질문을 품게 하며, 작품은 이 질문을 영상 밖 현실로까지 가져온다. 스크린 맞은편에는 음향이 없는 3분 가량의 영상 작품 〈하나에 들이마시고, 둘에 뱉으시오〉(2025)가 상영된다. 소리 없이 출렁이는 액체 위로 자막으로 구성된 대화가 이어진다. "시범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로그"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곧 이 대화가 인간 간의 것이 아님을 눈치채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 혹은 무엇이 말하고 있는가? "넌 이제 뇌를 거의 쓰지 않으니까"라는 문구는 〈당신의 존엄성을 위한 가장 완벽한〉에서 제시된 뉴럴링크의 서사가 이 작품으로 느슨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충전을 담당하는 AI, 혹은 클라우드를 관리하는 시스템과, 그 안에 자신의 데이터를 저장한 어느 사용자가 주고받는 대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듯 시스템에 접속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유지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인간에게 선택지는 없다. 전자가 '기술 밖에 남겨진 자 혹은 남은 자'의 양가적 처지를 보여줬다면, 이 영상은 '기술 안에서도 끝내 신뢰에 도달할 수 없는 자'의 불안을 드러낸다. 두 영상은 서로 마주 선 채 전시장 중앙에 보이지 않는 정전기를 형성하며 하나의 질문을 떠올린다. 기술을 의심할 권리와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 조정될 수 있는가? 이어 커튼을 젖혀 안쪽 공간으로 들어서면,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낮은 기계음의 사운드가 공간을 울린다. 〈Brain Charger〉(2025)는 잔상, 노이즈 등이 뒤섞인 글리치 클립이 몽타주처럼 분열·반복되는 싱글 채널 영상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데이터 조각 같지만, 폐허 속을 배회하는 너덜너덜해진 기계(혹은 인간)의 모습은 최우형 작가가 상상하는 미래와 그 미래 너머의 세계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작가는 "인간을 충전한다는 느낌으로 만든 작품"이라 말했지만, 실제로 관객은 '과부하—재충전—에러—리셋'의 무한 루프에 빨려 들어가는 기시감을 경험한다. 앞선 두 영상이 서술했던 기술 유토피아의 속삭임을 폭발시키듯, 이 작품은 디지털 폐허처럼 보이는 영상 속 시청각적 요소들을 통해 다가올 오류를 예고하는 경보처럼 보인다. 이 방을 나설 때 관객은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글리치를 간직한 채 다음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번 전시는 주최 측이 제안한 '공유미래'라는 테제를 작가가 역설적으로 해석한 결과다. 최우형 작가는 미래를 전제하지 않고 미래가 이미 끝난 이후를 먼저 상상한다. 기술이 약속한 '통합된 신뢰 사회'가 붕괴된 뒤, 인간이 감당하게 될 불완전한 접속과 신체를 냉정하게 들여다본다. 동시에 작가는 샘 올트먼이 한때 내세웠던 오픈AI 생태계가 그 뒤 자본·특허·데이터 독점으로 회귀했던 사례를 은유 삼아, 완벽한 존엄을 설계한 시스템은 언제든 그 설계를 거둬갈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환기한다. 2024년 이후 이어진 그의 작업은 더 이상 가능성으로서의 미래가 아니라 위협이 현재로 귀환한 순간을 다각도로 역추적한다. 최우형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함으로써, 오히려 관객에게 생존의 감각을 다시 배치할 기회를 제공한다. 〈당신의 존엄성을 위한 가장 완벽한〉의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인간은 언제부터 서로를 기억해주었을까? 이제는 안다. 디지털 식별자가 없는 이는 현실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이내, 존재가 말소된다." 작품 속 화자의 독백은, 전시장을 나서는 관객의 마음에 묵직한 부채감을 남긴다. 기술이 우리의 존엄을 보증해줄 것이라는 믿음, 혹은 기술을 두려워하면서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전시장을 돌아 나오며 한 켠에 타일로 조형된 〈Gate〉(2025)를 발견한다. 매끈한 디지털 화면 대신, 차갑고 단단한 건축 타일을 트랩처럼 배치해 관객이 밟을 수도 있도록 설치했다. 작가는 "타일을 밟는 순간 다른 세계로 진입한다"고 말한다. 평평한 세계라 믿었던 바닥이 아주 얇은 문턱으로 변하면서, 현실과 가상의 마찰 계수가 달라진다. 관객은 자신이 어느 세계의 중력을 따르고 있는지 의심하게 된다. 관객은 다시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편안한 의심"으로 되돌아갈 것인가, 혹은 'Gate'를 밟고 불편한 진실의 진동을 끝까지 가져갈 것인가. 최우형 작가는 대답 대신 몸소 걸어야만 열리는 문턱을 조형하고, 그 너머를 응시하는 일을 관객 각자에게 남긴다. 그의 세계에서 "완벽한 존엄"은 완성형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누락될 수 있는 열려 있는 변수이며, 그래서 더 치열하게 지켜야 할 생존 감각의 다른 이름이다. 기술은 파란 약처럼 편안한 몰입을 선사하지만, 그 약이 누구의 손에서 제조되었는지를 직시하는 순간 붉은 진실이 스며든다. 파란 약과 빨간 약 사이에 서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약의 색이 바뀔 수 있다는 불안 자체를 끌어안고 걸어야 한다는 것. 그 불안을 직시하는 태도야말로, 작가가 말하는 다음 존엄의 임계치일지 모른다.
  1. 같은 날 미팅 중 언급된 작가의 말을 인용했다. 이 후 등장하는 "" 속의 언급은 모두 작가의 말 혹은 영상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