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누각: 지상의 잔여로 지하를 상상하는 일, 그리고 끝나지 않는 길

2026

Critique · 추성아 (독립기획자)

사상누각》, wwwspace1, 2026

'사상누각(砂上樓閣)'은 모래 위에 세운 누각이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바닥의 촉감부터 흔들린다. 최우형의 두 번째 개인전 《사상누각》은 이 흔들림을 허무한 꿈의 교훈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전시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가 얼마나 기초 없는 안정을 연출해왔는지, 그리고 그 연출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보이지 않는 하부를 필요로 하는지를 하나의 내러티브 기반 3D 영상으로 밀어붙인다. 작은 규모의 전시가 한 점의 영상에 거의 모든 하중을 실어놓는 방식 자체가 사상누각의 형식과 닮아 있다. 한 세계가 겨우 한 스크린 위에서 버티는 동안, 관객은 '이 세계는 어디에 서 있나?'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번 전시에서 그 질문은 '지구공동설'이라는 세계관으로 본격화된다. 지구의 극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린 가상의 설정에서 시작되어 지상-지하, 장소-공간, 인간-비인간, 자연-인공의 경계가 단단히 고정된 채로 유지되는 세계가 아니라, 장소 안에 장소가 겹치고, 그 사이의 층위가 뒤섞이며 서로의 잔여를 먹고 자라는 세계가 펼쳐진다. 최우형이 그려내는 지하는 아래에 있는 다른 세계라기보다, 지상이 흘려보낸 것들이 물질뿐 아니라 감정과 언어까지 침전해 만들어낸 어두운 저장층에 가깝다. 그래서 이 SF는 먼 미래의 상상이라기보다, 이미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문명의 습관, 즉 버리고, 덮고, 잊고, 다른 곳으로 보내며 유지되는 습관을 낯선 형태로 되돌려 보여주는 장치가 된다. 서사는 인류의 탐사대가 북극과 남극의 입구를 통해 '안쪽'을 향해 이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거대한 것은 입구가 아니라 그 안쪽에 "비어 있는 공간의 크기"라는 말처럼, 이 사건의 스케일은 표면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두꺼운 먹구름이 극점에 운집하고, 수십 년 치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질 때, 지상의 사람들은 기이한 평온을 맛본다. 서로를 물고 늘어지던 목소리가 희미해지고, 마음속에 오래 묵혀둔 독 같은 감정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곧 뒤따르는 의심은 단순하다. 정말 종양은 사라졌는가? 아니면 어딘가 다른 곳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가? 정화처럼 보이는 사건은 사실 '이전'이자 '이동'일 수 있음을, 이 프롤로그는 단번에 예고한다. 그리고 이 흐름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은 영상 속 나레이션이 반복해 호출하는 두 단어 '구멍'과 '구덩이'에서 나온다. 구멍이 표면의 틈이라면 구덩이는 그 틈이 내부로 확장된 부피다. 둘은 모두 무언가가 빠져나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무언가가 들어갈 자리다. 그래서 이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은 출입구가 아니라, 부재가 장소로 굳어지는 방식에 가깝다. 비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비어 있음 자체가 어떤 힘이 되어 주체를 움직이고, 원점을 반복해서 호출한다. A와 B는 매년 연례행사처럼 그 구덩이로 향한다. 이 반복은 작품의 리듬을 만들고, 그들이 수행하는 임무는 실은 약탈에 가깝지만, 위에서는 그 단어를 쓰지 말라고 한다. 폭력은 늘 언어의 세탁을 동반한다. 경계에 가까워질수록 감각은 미세하게 어긋나고, "지하로 내려간다"는 행위는 수직 이동이 아니라 분류 체계 자체를 통과하는 경험이 된다. 영상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이동한다기보다 이동 그 자체에 붙잡혀 있는 듯 보인다. 무엇을 찾는지 명확하지 않은 채로 "이유를 찾기 위해 왔다"는 말만 남고, 이유는 늘 다음 공간으로 미뤄진다. 이 끊임없는 배회는 서사의 긴장을 유지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의 윤리를 드러낸다. 이 세계에서 확신은 도착이 아니라 탐색의 과정 속에서만 잠깐씩 발생한다. 그래서 관객은 장면을 따라가며 사건을 이해하기보다, 사건이 미끄러지는 동안 지금 '나는 어디쯤인가?'라는 끝없는 질문으로 계속 갱신되는 방향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구덩이는 이 이동을 더 잔혹하게 만든다. 일정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귓가에 속삭임이 들리는데, 이때 추락은 단순한 낙하가 아니라, 빈 공간이 주체를 끌어당기는 역중력처럼 느껴진다. 지하로 내려가면, 세계는 더 사실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불분명해진다. 금지구역, 허가, 심문, 위원회 같은 제도의 언어가 떠다니지만, 그 언어는 공간을 안정시키기보다 공간의 불안을 감춘다. 그리고 지하의 존재들은 지상에서 온 이들에게 친절한 안내자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그들을 시험하는 타자가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 대립이 영웅과 악당의 구도로 단순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빈 곳을 점유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고, 그 욕망은 언제나 정리라는 말로 포장된다. 누군가는 지상의 껍데기를 잠시 수거해 내부를 비운 뒤 자신들이 그 자리를 점유하겠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더 깊은 층을 열어 모두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정치적 갈등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빈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로 바뀐다. 이때 전시는 하나의 서사를 스크린에만 가두지 않고, 그 서사를 지탱하는 언어와 미시적 반복까지 전시장 안팎에 흩뿌린다. 단채널 영상 〈Pixel Labor〉(2026)는 3D 서사의 바깥에서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의 픽셀을 노동의 단위로 치환하며, 세계가 유지되는 방식이 결국 반복과 계산, 조정의 리듬 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텍스트 〈Stakeholders〉(2026)는 '관리 기능 이상 보고', '관리 권한 유지에 관한 공식 통지', '제10차 중간 평의 회합 기록' 같은 문서 형식으로, 작가가 조사한 개발 및 정비 사업 이해관계자 갈등을 이 세계관의 행정 언어로 번역한다. 책임 전가와 사실 확인, 서면 동의의 회수와 철회 요청 등, 충돌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규약 해석과 절차의 점유를 둘러싼 싸움으로 드러나며, 사상누각이 무너지는 순간이 언제나 문장과 도장 사이에서 먼저 발생함을 시사한다. 영상 〈시지프스〉(2026)는 이 모든 반복을 하나의 고전적 형상으로 끌어당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시지프스는 꼭 바위를 미는 노동자일 필요가 없다. 여기서 시지프스적 태도는 오히려 끝나지 않는 탐색, 도착이 유예되는 이동, 그리고 결론을 다음 문으로 미루는 세계의 구조에 있다. 문을 열면 방이 있고, 방을 지나면 또 다른 문이 있듯이, 설명을 붙잡으면 또 다른 설명이 미끄러진다. 매번 "이제 알 것 같다"는 순간이 오지만, 그 순간은 즉시 다음 층위의 어둠으로 떨어진다. 그러니 처벌은 고된 노동이라기보다, 확신이 완성되기 직전에 무효화되는 구조다. 그 구조 속에서 A는 보고해야 하고 돌아가야 하지만, 결국 돌아갈 수 없는 상태에 놓인다. 마치, 시지프스가 산을 오르내리며 반복한다면 이 작품의 주체는 내려간 뒤 올라오지 못하는 반복 속에 갇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또 다른 누군가가 채우며 구조는 계속해서 새로운 배회자를 생성하도록 한다. 이때 최우형의 3D 형식은 매끈하지 않고 흩어진 표면과 질감의 불일치, 오브제들 사이의 이질적 결합, 그리고 공간의 어긋남으로 직조되는데, 이것은 단지 스타일이 아니라 내용의 맥락과 맞물린다. 매끈함은 언제나 완결의 환상을 주는 반면에 이 작품의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감각을 남긴다. 그것은 세계가 영구히 미완이며 어디에도 완전한 기초가 없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관객은 이 세계를 그럴듯한 SF로 소비하기보다, 그럴듯함이 부서지는 순간마다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질문—무엇이 어디로 밀려났는가, 무엇이 어디에 쌓였는가, 그리고 그 빈 곳은 누가 점유하는가—을 떠안게 된다. 결국 《사상누각》에서 '사상누각'은 두 겹으로 겹친다. 하나는 지상이 쌓아올린 안정의 누각이 사실은 모래(잔여, 배출, 미뤄둔 말과 감정) 위에 서 있다는 고발이다. 다른 하나는, 그 누각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또 다른 이름, 또 다른 규율로 다시 그럴듯한 누각을 세우려 하고 그 과정에서 구멍과 구덩이를 더 키운다는 자화상이다. 이 영상에서 등장인물들이 끊임없이 찾고 헤매며 이동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순하다. 그들은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기초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누각의 세계에서 기초는 늘 이미 비어 있으며 그 비어 있음이 오히려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 그래서 전시장을 나설 때 남는 것은 결론이 아니라 감각이다. 구멍과 구덩이, 텅 빈 곳, 추락의 곳, 채워질 것처럼 보이는 곳,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곳, 이 단어들이 끝까지 귓가에 남아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 역시 어쩌면 어떤 공허 위에서 균형을 잡고 있었음을 뒤늦게 자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각이야말로 전시가 관객에게 건네는 무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