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꿈, 낯선 현실의 문턱에서

2025

Critique · 황수진 (월간미술 기자)

축축한 꿈 Fever Dream》, LDK.DT, 2025

2017년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에서 본 그레고르 슈나이더(Gregor Schneider)의 작업은 놀라울 만큼 평범한 아파트 구조를 반복해 통과하게 하며 출입의 감각 자체를 교란했다. 라디에이터가 놓인 복도—커튼이 드리워졌으나 창은 없는 거실—거울 달린 옷장만 덩그러니 놓인 침실—욕실을 돌고 나오면 다시 처음의 복도로 돌아오는 루프. 같은 길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하며 마지막 공간인 욕실에 들어섰을 때, 세면대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비로소 알아차렸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방금 전에도 물이 틀려 있었던가?'라는 미세한 의문은 영화 〈인셉션〉의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이상함을 끝없이 증폭시켰다. 공간을 빠져나온 뒤에도 어딘가에 갇혀 있던 듯한 께름칙함, 반복된 공간이 남기는 부유하는 인상은 최우형의 개인전 《축축한 꿈》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가라앉았고, 흐릿했던 기억의 표면이 조금은 맑게 떠올랐다. 백룸의 기원은 인터넷에 떠도는 한 장의 사진에서 비롯된다. 노란 벽지와 윙윙거리는 형광등,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끝없는 실내. 특정할 수 없는 공간이지만 익숙함에서 오는 섬뜩한 기시감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미지는 곧 밈으로 확산되었고 "이곳은 탈출할 수 없다", "괴물이 숨어 있다"와 같은 이야기가 덧붙여지며 하나의 규칙과 체계를 갖춘 세계관으로 확장되었다. 그렇게 공간 자체가 괴담이 되어 영상과 게임으로 재생산되며 인터넷 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텅 빈 공간이 오래도록 생명력을 얻는 이유는 기묘함 때문만은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를 휩쓴 것은 대안의 부재였다.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능력 자체가 마비된 것이다. 프레데릭 제임슨(Fredric Jameson)과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말했듯,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떠올리는 편이 더 쉽다. 마크 피셔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 부른 이 상태는 자본주의가 유일한 체제일 뿐 아니라, 그 대안을 상상할 수 없다는 무력한 감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국면이다. 한때 대안적이라고 불리던 양식조차 빠르게 주류화되는 이 역설적인 현실에서 백룸은 '유령 들림의 건축(architecture of haunting)'으로 등장한다. 사라진 미래에 대한 애도, 현실과 꿈, 익숙함과 낯섦이 뒤엉키는 경계의 감각. 그 불안의 정체는 직접적인 공포가 아니라, 경계 위에 오래 머무는 상태에서 스며든다. 결국 백룸에서의 탈출이란 대안 상상이 차단된 채 불가피성으로만 채워진 현실 자체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 모른다. 최우형은 이러한 불가피한 불안을 물리적 장치와 구조로 직면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전 작업 〈휴먼 리사이클〉(2025)이 현실의 어두운 이면, 감지되던 공포와 불안을 형상으로 실체화했다면, 〈축축한 꿈〉(2025)은 불안이 사건으로 드러나기도 전에 현실의 배경으로 스며드는 과정, 즉 무감각 속에 스며드는 두려움의 '형상 없는 형상'을 붙잡는다. 화면 안에서 여러 갈래 길의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결국 루프로 되돌아오는 구조, 자유를 연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인터페이스에 갇혀 있다는 자각. 관객-플레이어는 스스로 길을 만든다고 믿는 그 순간조차 시스템의 회로에 편입돼 있음을 체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꿈과 현실, 일상과 이면의 경계는 흐려지고, 무력감 속에서 침잠하는 '나'와 '우리'를 응시하게 된다. 최우형은 공포를 특정한 형상으로 제시하기보다 감각 자체를 구조화하여, 실재와 이격된 현실을 드러내려는 일관된 태도를 이어간다. 충격으로 각성시키는 대신 느린 체류를 유도하며 우리가 이미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만든다. 전시장 역시 이 불안을 구조로 재현한다. 들어서자마자 〈Gate〉(2025)를 통과하는 순간, 백룸에서 '노클립(no-clip)'이라 부르는 문턱이 공간의 장치로 번역된다. 이어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문과 복도를 따라가다 마지막으로 〈축축한 꿈〉을 마주한다. 여느 백룸 비디오게임처럼 의미가 벗겨진 사물들을 흩뿌린다. 라디오는 외부 소식으로부터 차단된 채 말의 껍데기만 흘리고, 아케이드와 전화부스는 접속의 흔적만 남긴다.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현실은 생소하게 다가온다. 전시장은 백룸의 규칙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환경이 되고, 서늘할 만큼 고요한 이곳에서 관객은 우연히 미끄러져 들어와 영원히 배회할 운명에 갇힌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이 전시는 '어딘가 잘못된 일상'에 체류하는 감각을 소환하며, 개념의 언어보다 앞서는 몸의 감각으로 미세한 공포가 뒤엉켜 메워온 모순과 공백을 자각하게 만든다. 전시는 두 겹의 차원으로 짜여 있다. 반복되는 방과 복도가 시간과 공간의 요철을 지워버린 전시장, 목적과 보상이 제거된 채 배회만 남은 게임의 구조. 두 층위는 서로를 비추며, 화면의 규칙이 현실의 이질감을 증폭하고 공간에 오래 머물수록 화면은 점점 실감으로 끌려온다. 2D 속 가상 공간에서 관람객은 현실과 가상,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더듬고, 다시 3D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에는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듯한 축축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시멘트 위에 꽂힌 파라솔과 천장과 벽을 가르는 덕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계약 조항, 켜진 TV가 내뿜는 재난 보도의 잔향이 공기를 더 눅눅하게 만든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우리는 묻는다. 방금 전 그곳은 가상이었나, 아니면 현실의 또 다른 층위였나. 답은 단순하지 않다. 아마도 둘 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호함이 불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호함은 인지를 지연시키고, 지연은 감각의 틈을 낳는다. 이 재감각화가 바로 최우형 작업의 정치성이다. 다른 체제의 상상이 막혀 있을 때라도 우리는 여전히 감각의 규칙을 낯설게 만들 수 있다. 마크 피셔가 말했듯, "무반응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중심이 없고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체계"와 조우할 때 우리는 자본이 만들어낸 인위적 둔중함과 맞닥뜨리게 된다. 《축축한 꿈》은 바로 이 지점을 게임의 문법으로 체험하게 한다. 무기력 속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은 실재를 환기하는 계기가 된다. 실재란 그 내부의 균열과 비일관성, 재현 불가능한 공백 속에서만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전시가 호출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감각, 체계가 은폐하려 했던 공백의 귀환이다. 관객은 그것을 불안으로 체험하고, 불안을 통해 다시 현실을 더듬게 된다. 우리는 언제든 불현듯 또 다른 백룸의 입구를 마주칠 것이다. 마치 2017년 설명할 수 없던 그 공간의 감각이 불시에 되살아나듯. 익숙함이 낯설어지는 바로 그 순간마다 현실은 또 한 번 뒤집힌 접촉면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